성경적 근거
에베소서 6장 17-18절에 관한 인용
17절에서 바울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 말한다. 하나님의 전신갑주인 여섯 개의 항목 중에 이것만이 대적을 공격하는 유일한 무기이다. 검으로 우리는 대적을 궤멸시킨다. 그러나 먼저 검을 드는 것이 아니라 첫번째로 허리띠를 띠고 흉배를 붙이고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들고 구원의 투구를 쓴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완전히 보호되고 구원을 우리 분깃으로 받을 때 성령의 검을 받을 수 있다.
17절에서 관계대명사가 수식하는 말은 영(Spirit)이지 검이 아니다. 이것은 영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나타내고 둘 다 그리스도이다(고후 3:17, 계19:13). 만약 내가 이 구절을 쓴다면 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검”이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 말했다. 여기서 언급한 검은 성령의 검인가 아니면 말씀의 검인가? 대부분의 독자들은 바울이 검이 말씀이고 성령이 검을 휘두른다고 말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방식으로 이 구절을 수 년 동안 이해해 왔었다. 나는 내가 아니라 성령이 검을 사용하는 줄로 알고 있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 이해에 따르면 검이 말씀이고 검을 사용해 대적을 치는 이가 성령이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성령이 검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도록 돕는다고 배웠다. 하지만 이것은 여기의 뜻이 아니다. 정확한 의미는 성령이 검이지 성령을 사용하는 이가 검이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 또한 검이다. 검은 성령이고 성령은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는 셋이 하나임을 본다:검, 성령, 말씀.
이 메세지에서의 나의 중심 부담은 이 것이다. 말씀은 성경이다. 하지만 이 말씀이 단지 인쇄된 글자라면 이는 성령도 아니고 검도 아니다. 17절에서 사용된 말씀의 헬라어 단어는 레마(rhema)인데 이는 어떤 상황에서 그 순간 성령이 하신 즉각적인 말씀이다. 불변한 성경의 로고스의 말씀은 즉각적인 레마가 되고 이 레마 는 그 영이 될 것이다. 그 영이 되는 레마 는 대적을 조각내는 검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느 특정한 구절을 읽고 또 읽어도 단지 글자로된 단어인 로고스 로만 남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어느날 이 구절은 우리에게 현재의 즉각적이고 살아있는 말씀인 레마가 된다. 그 때 이 레마는 그 영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또한 헬라어 단어 레마를 사용한다. 즉각적인 현재의 말씀은 그 영이다. 이러한 말씀이 검이다. 그러므로, 검, 그 영, 말씀인 이 셋은 하나다. 더욱이, 그 영이 아닌 우리는 이 검을 사용하여 대적을 죽인다.
그리스도인 체험안에서 말씀과 그 영은 항상 하나여야 한다. 말씀없이 그 영을 취한다고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거짓이다. 내 체험에서 나는 대부분 말씀을 통해 그 영을 받았다. 내가 살아있는 방식으로 말씀을 접촉할 때 그것은 내게 그 영이 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 영 없이 말씀을 취한다. 이것 또한 잘못되었다. 꽃을 가꾸기 원하는 사람들은 씨앗과 씨앗에 담긴 생명 둘 다가 필요하다. 씨앗과 씨앗안에 있는 생명을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명을 갖기 위해 반드시 씨앗이 있어야 한다. 말씀과 그 영의 관계는 씨앗과 생명의 관계와 같다. 우리는 반드시 둘 다를 갖고 있어야 한다. 주 예수님은 그 영과 말씀 둘 다 이시다. 그분이 말씀되시지 않고는 그 영이 아니시며 그 영이 되시지 않고는 말씀이 아니시다.
그분이 말씀과 그 영 둘 다 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를 이해할수 있는 생각과 받아들이는 영으로 창조하셨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생각과 영을 둘 다 사용해야 한다. 성경읽기로 우리의 생각을 사용하고 기도함으로 영을 사용한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 모두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기도로 읽어야 한다. 나는 기도로 말씀 읽기를 통해 내 영이 강해지고 대적을 삼킬 준비기 되어있음을 간증할 수 있다. 나는 단지 내 영을 사용할 뿐 아니라 내 생각을 사용해 말씀을 숙고한다. 예를 들어, 나는 왜 은혜와 진리가 4장에서 언급되고 사랑과 빛이 5장에서 언급되는지에 대해 물을 수 있다. 또한 이것에 관해 기도할 수 있다. 말씀을 기도로 읽을 때 마다 내 영이 더 강건해 지고 성령의 검을 사용해 대적을 더욱 치고 싶어 한다. 내 말 속에 대적을 산산조각낼 검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진리의 허리띠와 의의 흉배와 평안의 복음의 굳건한 기초와 믿음의 방패와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의 여섯 항목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한 전신 갑주로 장비될 때 우리는 대적의 공격에 맞설 수 있고 공격할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전신 갑주의 항목 후에 바울은 기도를 말한다.
18절은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라고 말한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는 17절에 있는 말씀을 수식한다. 기도로 우리는 구원의 투구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가 여섯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았다. 기도는 일곱번째로 생각될 수 있다. 기도는 우리가 다른 항목들을 적용하는 수단이다.
18절에 있는 “모든 기도와 간구로”라는 수식어는 14절부터 17절에 나온 전신 갑주의 여섯 항목과 관계가 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우리는 진리의 허리띠를 메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굳건한 기초로 신을 신는다. 더욱이, 기도로 우리는 믿음의 방패를 취하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검을 취한다. 우리가 갑주를 입거나 갑주의 어느 것을 취할 때 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 없이 하나님의 갑주의 어느 부분도 사용할 수 없고 사용하려 해서도 않된다. 기도는 하나님의 갑주를 적용하는 유일한 길이다. 기도로서 갑주가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유효하다. 예를 들어, 구원의 투구를 갖고 있지만 기도가 이 투구가 유효하고 우세하게 한다. 그러므로, 기도는 중요하고 절대 필요하다.
(위트니스 리, 에베소서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547-572)기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는 것은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아올 때 마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눈을 사용하여 읽거나 생각을 사용하여 이해해서는 않된다. 내가 나의 체험으로부터 간증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 눈과 생각으로만 성경을 접하면 성경은 단지 우리에게 죽은 글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성경 읽기는 기도와 함께 연합되어야 한다. 이것이 기도로 말씀읽기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 1절을 기도로 읽으면 우리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느니라. 태초에, 아멘. 주님 감사합니다, 태초에. 오, 하나님이 태초에 계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주님이 시작이시며 창시자이십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말씀을 기도로 읽을 때,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산 호흡이신 그 영이 된다. 그 결과, 우리는 적셔지고 영양분을 공급받고 신선해지고 빛비춤을 받는다. 죽은 글자의 책에서 멀리 떨어져 성경은 우리의 체험안에서 영양분을 공급하는 그 영이 된다.
에베소서 6장 17절과 18절에서 바울은 기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도록 확실히 명했다. 기도로 말씀 읽기를 반대하는 어떤 이들은 이 구절들을 이렇게 적용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헬라어 본문에 따르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기도로 혹은 기도를 통해 받아야 한다고 말해야만 한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라고 하며 또한 말씀을 기도로 받으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기도로 말씀읽기가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말씀을 읽어야 하고 기도로 받아야 한다. 수 세기 동안 많은 성도들이 이 원칙안에서 실행해 왔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이들은 우리가 기도와 같이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성경을 기도와 같이 읽는 것은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이다. 주님의 많은 백성들이 이러한 용어를 모르지만 기도로 말씀 읽기를 실행해 왔다. 말씀앞에 나아와 즉각적으로 말씀으로 기도하고 말씀을 놓고 기도했다. 여러분이 기도로 말씀 읽기에 대해 듣기 전에도 요한복음 3장 16절을 기도로 읽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를 읽고는 “오 하나님, 세상을 사랑해 주셔 감사합니다. 아버지, 나를 사랑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나를 그처럼 사랑하서 당신의 아들을 날 위해 주셨군요.”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이것이 기도로 말씀 읽기이다.
(위트니스 리, 빌립보서 라이프 스터디, 영문판 p.309-310)